아파트가 '재난위험시설물 E급'이라구요?

2010. 6. 23. 20:26건축의 내계/Aㅏ파트:투기적건축


아파트가 '재난위험시설물 E급'이라구요?

오마이뉴스 | 입력 2008.12.24 12:03

 
[[오마이뉴스 곽진성 기자]



서울시 서대문구 냉천동에 있는 금화시범아파트 4동 전경                               ⓒ 곽진성
[금화 시범 아파트 취재 내용을 바탕으로 의인화한 기사입니다 - 기자 주] 제 이름은 '금화시범아파트 4동'입니다. 저는 1971년 6월에 서울시 서대문구 냉천동 암반 위에서 태어났습니다. 중산층 주택 공급이라는 목적 아래 시범아파트가문 금화(씨)의 넷째 아들 '금화시범아파트 4동'으로 건설됐죠.
출생 배경이 남다른 금화시범아파트 1·2·3·4형제는 냉천동의 고급 아파트로 명성이 자자했었습니다.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빼어난 경관과 층층마다 개성 있던 외관 덕분이었죠.

하지만 세월에는 장사가 없나 봅니다. 긴 세월 동안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고급 아파트로 불렸던 금화시범아파트 4형제 중에 1·2동은 이미 오래 전에 철거되었습니다. 이제 냉천동에는 저(4동)와 3동만이 남게 되었죠.

하지만 서른여덟 번째 겨울을 맞는 저희 형제는 낡고 위험스런 아파트란 오명을 뒤집어쓴 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떤 주민은 저를 보며 땅값을 떨어지게 하는 흉물이라고 손가락질하고 또 다른 주민은 냉천동의 애물단지라고 욕합니다.

버스에서 흘러나오던 금화아파트단지라는 정겨운 안내 방송은 이미 새로운 아파트단지로 이름이 바뀐 지 오래입니다. 새 아파트, 새 이름으로 바뀌어 버린 동네. 주민들의 사랑은 제가 아닌 새로 지어진 아파트들을 향해 있었습니다.



법과 사유재산 보호가 충돌한 재난위험시설 E등급

금화시범아파트가 건물 안전 검사에서 'E등급'을 받았지만 관련 대책은 모호하기만 하다.
ⓒ 곽진성
이제 많은 것이 변해버린 냉천동, 하지만 저는 마지막 기력을 다해 버티고 있습니다. 몸이 쇠해 몇 번이나 정신을 잃을 뻔했지만 간신히 버텨냈습니다. 누군가는 묻더군요? 왜 아직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느냐고 말이죠. 제가 육중한 몸을 감당하며 남아 있는 이유는 입주민들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총 69세대인 금화시범아파트 3동과 4동에는 아직까지 30세대 정도의 입주민(세입자)들이 살고 있습니다. 제가 무너지면 그들이 위험해집니다. 입주민들만 무사히 이주한다면 전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텐데 말이죠.
2007년 7월 27일. 이날은 제게 잊지 못하는 날입니다. 건물 안전 검사에서 최악의 등급인 'E등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E등급은 '시설물 사용을 금지하고 개축'해야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제게는 일종의 사망 선고와 같은 것이지요.
그렇기에 즉각 사용이 중지되어야 했지만 금화시범아파트는 입주민들의 사유재산인 것을 이유로 서대문구청과 서울시에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습니다. 보수나 보강 같은 수술도 생각해 보았지만 경제성이 없다는 말을 듣고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제 마지막 바람은 보상 협의가 원만히 이루어져서 마음 편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실 몇 년 전에 해결의 실마리는 있었습니다. 냉천동 지역 주거환경개선 사업으로 저와 3동이 그 범위에 속한다 했을 때만 해도 이제 문제가 해결되겠구나 하고 한시름을 놓았죠. 제가 사라진 자리에는 녹지공간이 생긴다고 하니 얼씨구나 하고 좋아했죠. 하지만 보상금 액수를 놓고 아파트 입주민들과 서울시 간에 갈등이 생겼고 급기야 저와 3동은 주거 환경 개선 혜택에서 제외되는 불운을 겪고 말았습니다. 결국 철거는 없던 일이 되고 말았죠.


재난위험시설로 지정된 금화시범아파트 4동
ⓒ 곽진성
안전 검사 이후 1년 5개월이 지났지만 저와 3동은 바뀐 것 없이 그 자리에 방치되다시피 남아 있습니다. 저는 안간힘을 다해 버티고 있지만 해결점은 모호한 상태입니다. 그 사이 몸은 더 나빠졌습니다. 콘크리트들이 자꾸 떨어져 나가 철골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일 지경이 되고 만 것이죠. 계단은 곳곳이 균열되어 입주민들이 제대로 걷기도 힘듭니다. 옥상에는 전선과 쓰레기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어 안전사고도 우려됩니다.

그래서 담당구청인 서대문구청 건축과(재난관리과) 공무원들에게 저는 눈여겨봐야 할 환자 1호 입니다. 출입문 앞에 재난위험시설 지정 표지판이 걸린 것도 이 때문이죠. 표지판 속에는 이 아파트는 위험 시설물 E급이니 위급 상황시 구청으로 신고해 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어요. 하지만 "주민 여러분께서는 항상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재난이 발생하였거나 우려가 있을 경우에는 서대문구청으로 연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에 주민들은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죠.

재난을 미리 안다면, 피해를 볼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그나마 표지판에 재난관리과 전화번호가 적혀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정작 그 번호는 주말에는 연락이 되지 않는 번호였습니다. 붕괴 사고는 평일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닐 텐데 말이죠.

물론 공무원들에게도 고민은 있을 것 같습니다. 한 공무원은 아파트 붕괴의 위험성 때문에 '재난 및 안전 관리 기본법'을 발령해 입주민들을 강제 대피(퇴거)시키고 싶지만, 한편으로 개인의 사유재산이기 때문에 함부로 그럴 수는 없다고 푸념합니다. 그렇게 했다간 가난한 입주민(세입자)들을 더욱 곤혹스럽게 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을 토로합니다.

법과 사유재산 보호가 충돌해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1995년 7월 제정된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이지만 힘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금화시범아파트 내부 모습                                               ⓒ 곽진성
그렇기에 예방이 최선의 해결책이 아닐까 싶지만 예방에 대한 중요성은 희미해 보입니다. 서대문구청 재난관리팀 한 관계자는 금화시범아파트가 아직까지 붕괴할 위험이 없다는 판단를 내립니다.

"(금화시범아파트)가 대피 명령을 내릴 정도는 아니다. 구조적으로는 아직까지는 튼튼하다고 본다. 외부 전문가가 검사를 했지만 당장 붕괴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E급이 나왔지만 어떻게 보면 D급 정도로 볼 수 있다. (중략) 어느 상황에서, 어떤 조치를 해야한다는 가이드라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한 달에 한두 번, 공무원들이 육안으로 아파트를 확인하는 검사에서 신뢰성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서대문구청 뉴타운사업과의 한 관계자는 금화시범아파트가 철거되지 못하고 있는 속사정을 말해줍니다.

같은 서대문구청임에도 금화시범아파트의 안전을 바라보는 시각은 제각각 달랐습니다. "안전 문제 때문에 철거를 해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을 무작정 철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철거하려고 임대 아파트 신청을 받았었다. 당시 금화시범아파트 세입자들 전부 임대아파트를 신청했고 많은 수가 당첨되었다.

하지만 집주인들이 세입자들한테 보증금을 안 내줬다. 세입자들이 이사가면 빈집이 되고, 보상비를 일찍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영세한 세입자들은 보증금을 받지 못해 임대아파트로 가지 못했다. 지금 집주인들은 세입자들을 볼모로 잡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요?

2008년 1월, '재난 및 안전 관리 기본법'에 의거해 정릉 스카이아파트 다섯동의 입주민들을 강제 대피(퇴거)시킨 성북구청의 예는 어떨까요? 아파트가 붕괴 위기에 있었지만 관련 대책을 세워 입주민들의 안전을 지켜냈기 때문입니다. 성북구청 담당자인 문병한(43)씨가 당시 상황을 자세히 들려주었습니다.


"정릉 스카이아파트 입주민들을 대피시킨 이유는 안전 진단 결과 거주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예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성북구청은) 입주민들 생명과 신체 재산을 보호할 목적으로 D, E 급 재난위험 시설물에서 대피명령을 내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안전을 위해 철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보상 문제에 대해서도 말을 합니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조례 시행규칙에 의거, 아파트 입주민들에게 퇴거 명령을 내린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신경을 많이 썼다. 관련법에 임대아파트를 지원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있기에 이주대책을 세워 SH공사의 임대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서울시 재난관리기금을 받아 주택임차비용을 융자하게 했다.

또 이주할 때 세대당 51만원 정도(세입자 포함) 이사비용을 지불했다." 물론 관련 대책이 완벽했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 성북구청은 강제 퇴거된 정릉 스카이아파트 세입자들과 보상 액수에 관해 이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관련 구청이 신경을 써서 주민들의 안전에 대한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세입자들의 마지막 보루로 기억해주길

금화시범아파트의 여러 풍경들
ⓒ 곽진성
금화시범아파트에는 보증금을 받지 못해 떠나지 못하는 세입자들이 살고 있습니다. 냉천동 주민들 말을 들어보면 아파트 전체 세대 중 집주인이 살고 있는 곳은 한 세대밖에 없다고 합니다. 대부분이 값싼 월세를 내고 들어온 세입자들이죠. 냉천동 일대가 새 아파트 단지로 바뀐 지금 싼 집을 찾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가 됐네요.

어쩌면 이곳은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의 보루라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무너진다면 이제 세입자들은 어디로 가게 될까요?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언젠가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 행복한 왕자 > 를 본 적이 있습니다. 금과 빛나는 보석으로 감싸였던 행복한 왕자는 자신의 발밑에서 밤을 지샌 제비에게 부탁해 자신의 몸에 박힌 보석들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운명을 다하지요.

문득 돌덩이로 만들어진 동상 '행복한 왕자'와 돌덩이로 만들어진 금화시범아파트의 인생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초년에 값비싼 보석으로 치장했던 왕자님이나, 부자들이 터를 잡고 살던 금화시범아파트나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재밌는 것은 말년 역시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보석을 전부 나누어줘서 초라하게 버려진 왕자님이나 영세한 세입자들이 들어선 낡은 금화시범아파트나 말이죠.

'행복한 왕자' 같은 아파트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3동 앞 철문을 도둑질해 갈 때도 애써 담담하게 있었고 취객들이 낙서며 훼손을 할 때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물론 돌이켜보던 좋은 기억도 많이 있습니다. 몸이 불편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서로 부축해 계단 길을 오르며 저녁노을을 찬찬히 바라볼 때, 그들의 행복한 미소를 보게 되는 것만으로 저는 그 즐겁습니다. 갈 곳 없던 아저씨가 월세가 싼 이곳에 터를 잡고 다시 용기 내어 생활해 나가는 모습은 저를 '행복한 왕자'처럼 기쁘게 만듭니다.

압니다. 이제 그들과 함께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겠죠? 서울시와 아파트 입주민들의 보상 문제만 잘 해결된다면 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겠지요. 그러기 위해선 서울시와 구청 그리고 입주민들 사이에 원만한 해결이 선행되어야겠죠. 그래야 저는 정말 편안히 마지막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사라진 자리에는 무엇이 생길까요? 이곳에는 녹지가 조성된다고 합니다. 오래되어 흉물스러운 저보다는 녹지가 생기는 것이 훨씬 아름다운 일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부디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금화시범아파트라는 38년 된 아파트가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냉천동 가난한 세입자들의 마지막 보루였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