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의 사회학]오직 ‘팔기 위한 집’… 지붕만 쳐다보는 ‘살 사람’

2010. 4. 18. 21:59건축의 내계/Aㅏ파트:투기적건축

[주거의 사회학]오직 ‘팔기 위한 집’… 지붕만 쳐다보는 ‘살 사람’

중대형 1만가구 미분양 ‘불꺼진 대구’

경향신문 | 특별취재팀 | 입력 2010.04.18 17:54



지난 12일 대구광역시의 '강남'으로 불리는 수성구 범어동의 아파트 단지. 초저녁인데도 한밤중처럼 인기척이 뜸했다. 불켜진 집은 아파트 한 동 약 90가구 가운데 네다섯 곳을 넘지 않았다. 2008~2009년 준공한 7개동 600가구의 ㅇ단지, 5개동 467가구의 ㄹ단지, 9개동 1494가구의 ㄷ단지의 상황은 비슷했다. 단지 내에서 마주친 주민은 경비원을 제외하면 열 명 안팎이었다.



"125㎡짜리 아파트(38평)를 대출까지 끼고 샀는데 가격이 점점 떨어져요. 게다가 건설사가 미분양된 아파트를 할인해서 팔려고 한다니 실제로 저는 수천만원 손해를 보게 생겼어요. 집은 제 전 재산의 80% 이상을 차지하는데 말입니다. 건설사 입장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먼저 입주한 사람들이 입는 경제적인 피해는 어떻게 하지요." 귀가 중이던 주민 박모씨의 말이다.


 

미분양 가구수 전국 최다… 수년째 지역경제 발목

아파트 큰길 맞은편에는 상가가 불을 밝힌 채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입주가 완료됐다면 찬거리를 사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릴 시간이지만 슈퍼마켓, 빵집, 세탁소 등 어디에서도 손님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구광역시에는 올 2월 말 현재 전국의 미분양아파트 11만6438가구 중 1만6053호가 몰려있다. 경기도 다음으로 많다. 그러나 악성으로 불리는 '준공후 미분양 아파트'는 전국에서 가장 많다. 지난해 정부의 취득세·등록세 감면 조치로 일부 미분양 물량이 해소됐고, 지난 3월 감면조치가 연장됐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현재 남은 미분양 물량은 대부분 중대형 평형이다. 대구는 1990년대부터 고급아파트가 빠른 속도로 공급된 지역이다.



투기 노린 마구잡이 공급… 실수요와 완전 괴리

이 동네의 공인중개업자 이모씨는 수요와 어긋난 공급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구에서 흡수할 수 있는 중대형 주택에 대한 수요는 이미 끝난 지 오래죠. 그러한 집들을 살 만한 여력이 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요. 반대로 꾸준히 수요가 늘어나는 중소형 주택은 공급량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자연 이 지역의 중소형 아파트 전세 매물은 품귀현상마저 보이고 있다. 동구 신천동에서 만난 박모씨는 집을 구하기 위해 발품을 팔다 지쳤다고 했다. "지난해 말부터 전셋집을 구하려고 부동산만 수십 곳을 돌아다녔어요. 그런데 물건이 하나도 없어요. 대기명단에 '등록하시겠느냐'는 말만 들었죠." 실제 남구의 한 부동산업체에는 20~30평형대 아파트 전세를 구하려는 대기자 40~50명의 명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매물이 나오면 1시간 안에 일사천리로 계약이 이뤄진다. 전셋값은 일부 단지의 경우 매매가의 85~95%에 달하지만 사람들은 집을 사지 않는다. 미분양이 속출하다보니 집값 하락을 우려해서다. 부동산114 대구지사가 집계한 전세가 현황 통계에 따르면 대구지역의 전세가는 2009년 2·4분기부터 상승하기 시작해 올해 1·4분기까지 지속적으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2009년 2·4분기 0.34%로 소폭 상승한 전세가는 3·4분기 2.87%, 4·4분기 2.43%, 올해 1·4분기 1.28%로 수직 상승을 거듭하고 있다.

중대형 미분양 아파트가 대구에 많은 이유는 뭘까. 건설사들이 중소형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익을 많이 남길 수 있는 중대형의 비율을 늘려 지었기 때문이다. 대구시에 따르면 2005년 12월 말 대구의 전체 미분양 주택 3274가구 가운데 85㎡를 넘는 주택은 1407가구였으나, 2008년에는 1만2715가구로 9배 가까이 늘어났다. 사람이 '사는' 아파트가 아니라 전설사가 '파는' 아파트만 잔뜩 공급한 것이다.

중소형 전세 매물 품귀… 대기자만 40~50명

비슷한 시기에 아파트 건설이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진 것도 미분양 주택을 양산하는 원인이 됐다. 건설회사들의 아파트 건설사업은 주로 부동산 경기가 절정에 달했던 2007년에 집중돼 있다. 대구시는 주택건설사업에 대해 2005년에는 1건(566가구)을 승인했고, 2006년에는 4곳(2586가구)을 승인했으나 2007년에는 무려 16건(9654건)을 승인했다. 미분양 물량이 점차 느는데도 대구시는 신규사업들을 추가 승인한 것이다.

대구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조광현 사무처장은 "건설회사들이 투기적 수요를 노리고 중대형 주택 위주로 공급을 하면서 수요와 공급이 완전히 괴리된 상황"이라며 "그럼에도 불구, 대구시나 건설회사들은 중앙정부에 미분양 해소를 위한 대책을 명목으로 특혜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동산에 발목잡힌 경기는 쉽게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대구가톨릭대 전강수 교수(경제금융부동산학과)는 "최근 들어서야 미분양 주택 문제가 심각해진 수도권과 달리 대구, 부산 등 지역은 지난 몇 년간 미분양 문제가 지속되고 있다"며 "이러한 사태가 계속된다면 지역의 건설사나 금융권은 물론 지역경제 전반에 악영향이 파급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해법을 놓고는 주장이 엇갈린다. 대구광역시는 1가구 2주택자에게 일정금액 이하의 경우 양도소득세 중과세를 면해주면 서울이나 수도권 거주자가 지방 미분양주택을 매입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지역에서 판로를 찾겠다는 의미다. 반면 시민사회는 마구잡이로 아파트를 지어온 건설사들이 '자연도태'되도록 해야 아파트 거품이 빠지고 지역경제를 되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경실련 조 사무처장은 "망할 수밖에 없는 건설회사들은 망하게 하고, 현재의 재개발 방식을 주거약자인 원주민들의 터전을 보호하는 쪽으로 전환해야 장기적으로 대구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대구 경제도 살아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