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6. 3. 12:43ㆍ추억-기억을 따르다.
"한국인의 냄비근성"은 식민사관의 패배의식으로 "세뇌목적"으로 일제가 만들어 낸 구호(아젠다)입니다.
즉,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좌파세력의 결집을 위해 택한 자살로 매도하는 무리들과,
친일세력의 결집을 위해 한 명도 스스로 자살할 용기는 없는 무리들의 조상들이
과거를 부정하고, 식민시대를 긍정하게 만들어, 통치를 쉽게 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 내고 확대 재생산한 식민적 패배주의의 세뇌목적의 구호이고 이념입니다.
그 잔재의 뿌리가 너무 깊기에 우리는 지금도
우리 스스로의 정의로운 행동을 냄비근성으로 비하하게 됩니다.
유독 정의롭고 의로운 행동에만 "냄비근성"이라는 말이 달린 기사와 댓글이 많습니다.
운명론적 사고와 불교적 허무의식을 태어날 때부터 문화적으로 어느 정도는 지니고 태어나는
우리 민족에게 오랜 시간 동안 아주 잘 먹히는 "세뇌 구호"였던 셈이지요.
철학자들은 자신이 쓴 책에 담긴 문장처럼 살다가 죽고
가수들은 자신의 노랫말처럼 살다가 죽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언어의 영향을 받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자주 내뱉는 한두마디 말처럼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자발적 세뇌니까요.
"난 뭘해도 안돼" "난 뭐든지 돼" 라고 습관처럼 내뱉는 푸념과 잡담이
자신의 미래를 만드는 "언어적 내면화"의 힘입니다.
이런 언어의 힘을 권력은 잘 이용할 줄 압니다.
500만의 추모 인파를 보고, 언론과 정부기관들과 패배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냄비근성"이라는 일제시대부터 이어진 세뇌구호를 꾸준히 연관 짓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폭발력과 잠재력, 역동성은 냄비와 뚝배기로 감당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권력은 대중이 스스로를 폄훼할 수 밖에 없는 개념과 구호를 만들어야 했겠지요.
저는 감히 권력유지의 악한 목적과 "피지배자들의 패배적 내면화" 의도를 가진
"냄비 근성" 이라는 나쁜 개념을 우리가 가진 본질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바꾸고자 합니다.
"가마솥 근성" 과 "뚝배기 근성" "구들장 근성"
가마솥 근성은 장작의 화력으로도 데우기 어렵지만 한 번 데워지면
그 온기가 은근하게 남아 식지 않는 채 유지되는 뒤끝을 의미하고
뚝배기 근성은 "한번 가진 소신과 신념"은 외부온도와 관계없이 잘 바꾸지 않는 뚝심을 의미하며
구들장 근성은 아궁이 가까운 곳은 열기가 과하여 장판 바닥을 검게 태울 정도로 뜨겁고,
그 뜨거운 열기에 감화되면 주변의 돌들도 덩달아 데워져 방안의 온도를 한 겨울에도
40도 이상으로 유지시키며 "창호지로 막은 출입문"으로도 겨울을 버티게 해주는
강하고 덥고 오래가는 열정을 의미합니다.
권력이 보기에는 아궁이 가까운 곳만 열이 과하여 장판이 탈 정도인 것만을 보고
금새 식어버리는 냄비근성으로 폄훼하여 부르고 싶을 겁니다.
그러나 검게 그을린 그 장판의 주변 부위와 가장 구석진 구들장의 주변도
손바닥을 못 댈 정도로 뜨겁다는 것은 권력이 아닌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그리고 그 뜨거운 열기가 오래도록 유지된다는 사실 또한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이미 아궁이에 가까운 구들장의 장판은 검게 탔습니다.
주변의 구들장으로도 온기가 전파되어, 구석진 후미까지 손바닥을 못 댈 만큼 뜨거운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를 "냄비근성"으로 폄훼하고 싶어하는, 건드리는 자의 의도대로
반응하면서 살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합니다.
시청광장에 모인 추모객을 "냄비"로 몰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영결식을 지켜보는 가장낮은자 올림
<추신>
강준만 교수의 책에서 여러번 언급되다시피
"한국인은 보수적이다" 라는 개념도 조중동 언론이 자신들의 정권과 권력 유지를 위해
유리한 계층의 포섭을 위해 "세뇌목적"으로 만들어 낸 구호입니다.
역사적으로, 세계적으로 한국 민족은 가장 역동적이고(다이나믹), 변화무쌍하다고 학자들에게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독 조중동에서만 한국인은 보수적이랍니다. 유교적 예식을 근거로 들면서요.
모든 세뇌목적의 구호는 일견 타당하지만, 본질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언론으로, 교육으로 세뇌 받아온 말과 이념의 힘이
자신의 행동을 패배적으로 만들어 간다는 걸 잊지 마세요.